포럼 요약문: 21세기를 위한 신학과 생태론

다음은 메리디안 180 포럼 '21세기를 위한 신학과 생태론' (2015년 9월-10월 진행) 요약문입니다.

요약문 작성자:

2015년 9월에 메리디안 180은 인류학자, 법학자, 문예학자, 미래학자, 지리학자, 변호사, 철학자 등을 모시고 프란체스코 교황의 2015년 회칙 ‘찬미받으소서: 우리 모두의 고향을 지키고자 (Laudato Si: On Care for Our Common Home)’에 관한 논의를 활발하게 펼쳤습니다. 이 토론을 통해 도출한 주요 시사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찬미받으소서’에서 내놓은 지구 환경에 관한 진일보된 입장의 기반이 되는 강력한 제도, 역사, 사상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리처드 어바인(케임브리지 대학)은 ‘찬미받으소서’의 주석에서 비유럽권의 카톨릭 주교, 철학자 폴 리쾨르, 동방정교회 교부, 9세기 이슬람교 신비주의자 등을 인용한 점에 주목했습니다. 빈센트 이알렌티 (코넬 대학)는 교황이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의 1996년 저서 ‘대지의 울부짖음과 빈민의 울부짖음 (Cry of the Earth, Cry of the Poor)’, 비판이론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Herbert Marcuse)의 1964년 저서 ‘일차원적 인간 (The One-Dimensional Man)’ 등을 언급한 점을 논했습니다. 피터 윈 커비(옥스포드 대학)는 여러 가지 지식의 형태를 존중하는 교황의 준인류학적 접근을 칭찬하면서도 교회의 ‘종종 고압적이고 완고한’ 태도를 비판하였습니다. 카렌 핀커스(코넬 대학)도 마찬가지로 가장 진보적인 대목에마저 텍스트에 깔린 ‘기반암’, 즉 반대의견을 억압해온 교회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였습니다.

메리디안 180 회원들은 이와 같이 ‘찬미받으소서’는 단일 작가가 작성한 고립된 단일 텍스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토론 참여자들이 제기한 지적 도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여러 사람이서 저작한 ‘찬미받으소서’의 배후, 저변, 주변에는 어떤 맥락과 토의, 인물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배경이 텍스트의 윤리적 기반이나 수사력을 약화하거나 강화하는 기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2) 삶의 방식을 재고하라는 교황의 촉구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검토하여야 합니다.

스티븐 험프리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는 프란체스코 교황과 마틴 하이데거의 기술중심주의 비판 사이의 유사점을 탐구하여 양자 모두 ‘이곳에서 지금, 작은 것’, 즉 자연의 아름다움과 예술이 품은 ‘구원의 힘’을 희구하였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카이다 테츠야 (KAZE Creative)는 타인을 포용하고, 변화에 마음을 열고, 감각적 경험 (바람, 색채, 미각, 영양 등)을 음미함으로써 사회를 ‘통합적으로 재창조’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지형 (이화여자대학교)은 삶의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되고도 남는 수많은 사람이 어째서 가난한 이들의 절박감을 심화하고 부자의 행복감을 증진시키지 않는 체제 속에서 지치도록 일을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허화이홍 (북경대학)은 ‘진녹색’의 생태주의적 진보가 부유한 지도층과 강력한 제도적 장치뿐만 아니라 부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공중의 절대다수에게 저지당하는 현상을 설명하였습니다. 위싱종(코넬 로스쿨)도 마찬가지로 현대의 과학적-합리주의적-경제적-법적 인간형의 확산이 인류의 감수성, 감정, 미적 능력, 고도의 영성 발달을 저해하였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팀 맥렐란(코넬대학교)은 자신이 아는 중국 농업생태학자들이 농촌의 생태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동시에 의미와 영감, 신비에 마음을 열어놓고 풍경을 즐기는 모습을 묘사하였습니다.

돈과 사유재산, 숫자와 기술에 집착하는 세태에 대한 교황의 비판에 답하여 메리디안 180 회원들은 대안적 삶의 방식, 가치관, 야심과 즐거움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의미와 미적 감상, 충족감이 일견 생동감 없는 듯한 기술과 경제, 계량화의 논리와 나란히, 그 속에서, 혹은  그에 반응하여 나타날 수 있을까요? 혹은 그 두 가지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새로운 삶의 양식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3) 21세기의 요구인 경제발전, 빈곤 완화와 환경 보호를 현실적으로 조화할 수 있을지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더글라스 카이사(예일 로스쿨)는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연합 기본협약(UNFCCC)의 1992년 계획이 실현되지 않은 점을 개탄하였습니다. 또한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 특권층의 권력에 미국 내의 유의미한 탄소가격제가 가로막힌 현실을 지적하였습니다. 에이미 레빈(부산대학교)은 기후현실주의, 환경근대주의, 친원자력 비판을 논하면서 역시 ‘찬미받으소서’의 발전관이 이상주의적인지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경제발전 제한과 빈곤 완화를 동시에 주장하는 교황의 입장이 과연 현실적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자는 소비 감소, 후자는 소비 증가를 수반하지 않을까요? ‘찬미받으소서’에서 제시하는 (상호 충돌하는) 여러 목적을 정말로 동시에 추구할 수 있을까요?

4) 이기적 과잉소비와 종교에 관한 통합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찬미받으소서’는 현대의 환경주의 및 반소비주의 사상을 오랜 전통의 기독교 사상에 결합시킵니다. 그러나 메리디안 180 회원들이 지적했듯이 물질주의를 배척하라는 촉구는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허화이홍은 중국에서 유교, 그리고 현대에 인기를 끄는 도교와 불교 전통이 물질주의적 욕구를 제한하려고 노력한 역사를 설명하였습니다. 지청은 종교가 ‘대체로 환경을 존중’한다고 덧붙이면서 불교에서 낭비와 사치를 배척해온 전통을 예로 들었습니다. 수천 년을 이어온 세계 여러 종교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는 장기적 안목을 기를 수 있을까요? 오늘날의 기술지배와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현상으로서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지배해온 종교·윤리적 기틀과 배척되며, 불가피한 법칙이 아닌 가역적인 추세입니다. 다른 종교전통에서도 반소비주의적 혹은 환경주의적 세계관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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